노오경 <For Better Life (배러라이프를 위하여)>전

“배러라이프” 신화는 어떻게 우리 삶을 좀먹고 있는가?



영돈(미술 비평, 서울대학교)



현대의 인간은 항상 더 나은 것을 갈구한다. 대학을 위하여 청소년기를 보내고, 취직을 위하여 20대를 보내며, 노후를 위하여 직장을 다니는 우리네 현대인은 언젠가 도래할 찬란한 미래를 저마다 마음속에 그리며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작가는 <공든 탑 쌓기> 워크숍을 진행한 바 있는데, 그 과정은 영상으로 결과물은 디지털 프린팅에 의하여 “과거”에 속박된 상태로 제시된다. ‘쌓기’의 과정과 결과물은, 적어도 전시장 내에서는 과거일 뿐인데, 전시의 “현재”로 제시되는 것은 작가의 손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진 탑이다. 그 무너짐은 어느 관객에게든 각자의 현재로 자리잡는데, 정확하게는 무너진 탑이 전시장 속에서 “현재”의 자리에 속박된 것일 테다. 아크릴 상자로 관객과 철저하게 분리된 탑들은 다시금 ‘공든 탑’으로의 재건축 시도를 제거당하여 미래를 상상하려는 행위 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상정하게 된다. 작가는 의도적인 해체 행위를 통하여 무너진 현 상태만을 강제로 관조하도록 대상을 가두어놓는다. 워크숍과 함께 <아슬아슬탑>, <진실의 탑>, <유소유의 탑>으로써 단계적 쌓아감의 관념이 제시되고, 이는 전시명 “For Better Life”와 병치되어 맹목적 건축지향의 삶에 대한 의구심을 제고한다. 워크숍 과정 자체가 하나의 시뮬라시옹으로, 이에 대한 해체 시도로써 작가는 미래지향적 사회 이면의 실재를 더듬는다.

    “공든 탑”은 전시의 방향성을 제시한다면, “최고수” 시리즈는 해당 시뮬라시옹의 메커니즘을 벗겨낸다. ‘영험한 약수’ 신화를 답습한 “최고수”는, 시장의 정상을 차지한다는 다분히 의도적인 이름짓기를 통해 새로운 신화로 전시장에 자리잡는다. 작가는 최고수라는 기호를 창조함으로써,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신화의 생산방식을 그대로 베껴내어, 그것을 랑그의 기호이자 신화의 기표로 제시한다. 그렇게 그는 “Better Life”의 신화화 방식을 공개적으로 비웃는 탈신화화 방식을 채택한다. 관객은 전시장에서 디지털 작업 세 점을 먼저 마주하는데, 이는 연령계층에 따른 마케팅 전략을 각각 취하고 있기에 자신에게 익숙한 하나 정도의 작품은 탈신화의 대상이 아닌 신화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이윽고 그것들과 병치된, 종교와 약수의 굳건한 담합을 고발하는 영상 작업 <“배러(better)”한 물 만들기>를 마주한 뒤, 관객은 본인에게 신화의 대상으로 잠입한 해당 디지털 프린팅 작품을 푼크툼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종지에는 스티로폼과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노오경 선생”이라는 신에 의해 창조된 최고수 샘, 그곳에 거짓으로 혹은 진심으로 각자의 “배러 라이프”에 대한 소망을 부착함으로써 신의 신화화, 혹은 작가의 탈신화화에 이바지한다.

    멀리 있지만 생각보다 단단히 자리잡은 대한민국의 유서 깊은 기복신앙과 더불어, 가까이에 있지만 누구도 쉬이 알아채지 못하는 현대 사회의 성공신화까지, 전시 는 보다 나은 미래만을 삶의 동력으로 삼는 세태를 꼬집지만, ‘카르페 디엠’과 같은 흔해빠진 격언으로 갈무리되지는 않는다. 견고하게 형상된 상징계 이면에는 언제나 무시무시한 실재가 도사리고 있고, 그 실재의 옅은 살결을 맛보게 해주는 것이 작가의 유일한 역할일 테다. 그 잠시간의 경험을 재창조하는 것은 전시장 속 “현재”에 속박되어있던 관객이 그곳을 벗어나고부터의 “미래”를 어떻게 형성해나갈지에 달려있다.